사진으로 보는 청와대
사진과 설명으로 보는 청와대1
대(臺)’란 평지보다 높은 곳에 만든 평평한 구조물이다. 이런 구조물은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땅을 굽어보기 위해 만든다. 첨성대·관천대 등은 하늘의 뜻을 읽기 위한 것이었고 수어장대(守禦將臺) 같은 장대는 군사를 지휘하기 위한 것이었다. 축대란 ‘대’를 쌓는 일, 또는 그렇게 쌓아 올린 벽을 지칭한다. 옛날에 궁궐에 세운 임시 무대를 ‘산대(山臺)’라 했는데, ‘산처럼 만든 대’라는 뜻이다. 춤은 본래 신을 부르는 행위였기 때문에, 고대에는 무대(舞臺) 역시 높은 곳에 만들었다. 높은 곳에 펼쳐진 평지도 흔히 ‘대’라 불렀다. 필운대·파총대 등이 그런 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뒤 그 뒤편 언덕 위의 평지를 ‘무예를 구경하는 대’라는 의미에서 경무대(景武臺)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위에는 융무당과 융문당 등의 건물을 지었고, 친경전(親耕田·임금이 몸소 경작하는 논밭)도 마련했다. 문무(文武)가 융성하고 산업이 발달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였다. 그래서 과거 시험도 이곳에서 자주 치렀다.
고종이 경복궁을 떠난 뒤 경무대도 공적 관리 대상에서 벗어났다. 경무대 위의 건물들은 퇴락해 갔고 일제 강점기에는 그 자리에서 전국 궁술(弓術) 대회니 가정부인운동회니 하는 행사들이 수시로 열렸다. 1929년 노산 이은상은 ‘경무대를 지나며’라는 연작 시조를 지었다. ‘가슴에 품은 뜻이 얼마나 많았던가 / 남긴 일 무엇인지 알 길이 전혀 없네 / 누구서 위국충절이 장하였다 하는고.’
1939년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경무대에 새 관저를 지었다. 그 뒤로 경무대는 금단의 지역이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경무대가 지명(地名)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총독 관저는 해방 뒤 주한미군 사령관이 머물다가 정부 수립 후 대통령 관저가 되었다. 정확히는 ‘경무대 대통령 관저’였으나 이곳에 다른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경무대가 관저 명칭처럼 사용되었다.
1960년 12월 30일, 윤보선 대통령은 “경무대가 전(前) 정권 때에 폭정을 자행한 곳으로 국민들에게 원부(怨府)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청와대로 개칭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지명을 건물명으로 잘못 안 탓이지만 어쨌거나 이후 대통령 관저는 청와대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하기야 이름을 잘못 지은 것이 대수인가? 때로 천문대가 되어 하늘에 비치는 민심을 잘 살피고, 때로 무대가 되어 국민들 즐겁게 해주면 그뿐인 것을.
-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6·25전쟁 중 임시 수도 부산에서 환도하기 직전의 경무대 대통령 관저.
일제 강점기 이 건물을 지었을 때의 공식 명칭은 그냥 ‘총독 관저’였다.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
눈 내린 경무대(1956년)
사진과 설명으로 보는 청와대2
대통령 관저 및 집무공간의 생성과 역사적 배경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 관저
조선총독부 관저는 1939년 7월 25일 준공되어 동년 9월 20일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1945년 조선총독부가 철수하기까지 일본 정부의 한국 지배를 위한 식민통치의 정령을 내리는 한국 내 최고 통치자의 사택으로 있었다. 이 신축된 총독 관저의 첫 입주자는 제7대 총독인 미나미 지로(南次郞)로 1937년 조선에 부임해 와서 1942년 5월 25일까지 사용하였다. 제8대 총독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로 1942년 5월 29일 부임하여 1944년 7월 22일까지를 총독관저에서 생활하였다. 태평양전쟁이 한참 진행되는 과정에서 부임해 왔기 때문에 총독관저의 모든 기능과 운영체제도 전시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에 총독관저의 전기사용시간의 제한, 신축 및 증축금지, 후원의 관리 등에 대해서도 규제를 가하였다.2) 따라서 비상사태로 돌입한 총독관저는 연합군의 공습에 대비, 본관 건물 전체에 의장강(擬裝綱)을 씌우고 본관 북쪽 산기슭에 방공호(지하벙커)를 만들었다. 제9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마지막 총독으로 종전 1년 전인 1944년 7월 25일에 부임하여 이듬해 8월 15일까지 이 관저에서 생활하였고, 거의 패전이 짙어가고 있는 전시에 부임하였기 때문에 관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이 무조건 항복하자, 아베 총독은 주요 문서, 서류등을 불태우고, 집기를 닥치는 대로 부수고 곱게 단장되어 있던 다다미방을 훼손시켰다. 미군정은 계속 일인관사(日人官使)를 주둔케 했지만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반일(反日) 의식은 1945년 아베 총독을 해임하고 한국을 떠나게 만들었다.
(왼쪽)조선총독부 거실 (오른쪽)조선총독부 제2접견실
해방 이후 미군정기의 경무대와 이화장
아베가 물러난 후 처음으로 경무대의 주인이 된 사람은 미국 극동군 사령부 소속 제14군단 사령관 육군 중장 하지(John. R. Hodge)였다. 한국의 실질적 최고 통수권자인 하지는 몇 달간을 조선호텔과 반도 호텔에서 지내다가 1945년 12월 중순경에 총독관저로 옮겨와 이곳을 미군정 사령관의 관저로 바꾸었다. 그 후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면서 경무대(景武臺)라고 불렀다. 이때 1945년 해방되자 망명지인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의 실업가 권영일 등의 도움으로 1947년 11월에 동소문동 돈암장에서 이화장3)으로 옮겨서 경무대로 이사하던 1948년 7월까지 기거하게 된다. 1960년 4월 27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서 다시 이사하였고 5월 29일에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왼쪽)경무대 대접견실 (오른쪽)경무대 평면(1948-1960)
(왼쪽)경무대 당시 응접실 (오른쪽)경무대 현재 응접실
(왼쪽)이화장 전경 (오른쪽)이화장
임시수도시절 대통령 관저의 사빈당
6.25가 발발하여 1950년 8월 임시수도가 부산으로 옮겨감에 따라 전쟁이 진행되던 3년간(1950-1953) 전 경남지사 관사가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사빈당이라는 당호로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개조, 공개되고 있는 사빈당은 1926년 9월에 준공되어 일본인 경상남도 지사가 거처하는 총독부 소속의 관사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1950년 9.28서울수복과 함께 부산에서 서울 경무대로 대통령 관저를 이전하여 3개월을 지냈으나 1951년 1.4후퇴로 경무대 대통령 관저를 청산하고 다시 부산으로 옮겨서 1953년 휴전을 맞아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이 건물은 약 2년 동안 대통령 관저로 사용 된 것이다.
(왼쪽)구본관 전경(오른쪽)구본관 대 회의실
(왼쪽)영빈관 내부(오른쪽)박정희 대통령 집무실
제 2, 3, 4, 5 공화국과 청와대
4.19의거로 제1공화국이 무너지고 경무대의 새 주인이 된 윤보선 대통령은 경무대로 이사한 지 4개월 후인 12월 30일에 독재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경무대라는 이름을 없애고 청와대(靑瓦臺)라고 개명했다. 5.16 군사혁명에 성공한 박정희 소장이 제3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함에 따라 청와대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였다. 1978년 12월에는 각종 의전행사 및 기자회견장으로 4층 규모의 영빈관(迎賓館)이 신축되었다. 최규하 대통령 때에는 본관 내부를 한·양식 절충형으로 대규모 공사를 하여 대통령은 소접견실을 집무실로 대신 활용하면서 삼청동 총리공간을 사용하였다. 제5공화국 때 전두환 대통령은 본관 입주 후 1980년 12월에 본관 현관의 위치를 변경, 부분 증축하게 되고, 영부인 접견실을 전통 한식으로 개조하는 등 전문가(설계: 김수근 공간연구소장)에게 의뢰하여 리노베이션 작업을 진행하였다.
(왼쪽)제6공화국 국무회의실 (오른쪽)대접견실
(왼쪽)대통령 관저 현관 (오른쪽)대통령 관저 식당
제6공화국의 청와대 신축
제6공화국의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조선총독부 관저로써 이용되어 온 청와대 건물이 낙후하고, 외국 국빈들의 잦은 방문으로 국빈접대의 장으로 쓰기에는 공간이 협소하여 신축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따라 1989년 7월에 신 본관을 기공하여 1991년 8월 15일에 완공하였다. 대통령의 집무공간과 생활공간이 한 건물에 위치함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던 구 본관을 분리하여 관저 건물을 신축하였고, 1990년에는 언론의 활성화로 춘추관이라는 언론공간을 청와대 경내에 신축하게 되었다. 구 본관 건물은 조선총독부 관저로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에 일제의 잔재를 일소한다는 의미로 김영삼 대통령 집권 시 1993년 대통령의 지시로 중앙청 건물과 함께 철거, 소멸되었다.
(왼쪽)청와대 본관 전경 ((오른쪽)청와대 본관 1층 현관 홀
- 출처 <대한민국 근대 실내건축 기행> 연재 오인욱 교수 “건축으로 역사를 말하다”
http://www.seouldesign.or.kr/bbs2/view.jsp?seq=1234&code=&part=&item=